민족 분쟁의 최전선 팔레스타인, 비통에 잠긴 이스라엘

김영은

news25@sisatoday.co.kr | 2005-10-06 16:09:47

-가자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강제철거 시작 팔레-1 팔레-2

지난 8월 17일 이스라엘 당국은 군을 앞세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 강제 철거를 단행했다. 이날 오전 이스라엘 군경 병력 약 1만4천 명이 불도저를 앞세워 4개 정착촌에 진입했다. 이들의 주요 목표는 가자지구 최대의 정착촌이자 저항세력의 거점인 ‘네베 데칼림’이었다. 일부 정착민들은 대못을 이용해 지나가는 자동차 타이어에 구멍을 내거나 군경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강하게 저항했다.

네베 데칼림 저항세력의 주축은 가자지구를 ‘유일신인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굳게 믿는 유대교 신자들로 구성돼 있어 이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곳곳에서 유혈 사태가 잇따르고 긴장감이 고조됐다.

약 14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자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은 1967년 제3차 중동전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였다. 이날 시작된 작전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희비가 엇갈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영 TV에서 내보내는 철수 작전 모습과 이주를 거부하는 수많은 정착민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비통에 잠겼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대인 정착촌 인근의 팔레스타인 마을인 칸 유니스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 병력의 철수 작전을 여유롭게 지켜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분쟁의 씨앗

팔레스타인 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발생했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해 본격적인 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해 약속의 땅인 가나안 즉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에 필리스틴(Philistine) 즉 현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곳에 이주하면서 양 민족 간의 길고도 험한 영토 분쟁의 싹이 텄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反유대인 운동이 전개되고 이에 맞서 유대인들은 새로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대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들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발표했다. 이것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그들 선조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조국을 재건하려는 시오니즘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편 영국은 1917년의 발포어 선언문을 통해 미국에 거주 중인 유대인들을 이용해 미국의 대독일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대인 재벌들의 전쟁 재정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조국 재건에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 약속을 저버리고 1920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위임통치했다. 그 후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권장하는 정책을 취해 유대인들은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1933년 이후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그들의 이주를 본격적으로 가속화시켰다.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UNSCOP 결정으로 유대인, 이스라엘 국가 수립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원주민인 아랍인들의 반발과 저항 또한 거세졌다. 이에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대인의 지구로 분할했다. 유대인들은 이 결정에 찬성한 반면 아랍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아랍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국제적 공인을 받으면서 정치적 위상도 높아졌다.

-인티파다, 폭풍 전야 쟁점으로 떠오른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문제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하고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이 미국 백악관에서 화해의 뜻을 담은 악수를 나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94년 유대인 정착민이 요르단강 헤브론 사원에서 예배보고 있던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이스라엘 북부 지역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감행해 8명이 사망했다.

각종 테러가 빈발함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내 예리코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면서 유대인 정착민 보호를 위한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했다. 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으며 각료들과 함께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98년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통해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분쟁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러나 요르단강 서안에서 폭력사태가 잇따르자 결국 철군을 중단했다.

99년 5월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가 평화협상을 재개했으나 양측의 핵심 쟁점에 관한 협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와 시기,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선포 시기 및 예루살렘 문제 등의 현안이 쟁점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2000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간의 투석(投石)으로 인한 충돌에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해 팔레스타인 7명이 사망, 220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反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Intifada)’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서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적인 데모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탱크와 미사일 등을 동원해 보복하는 등 갈수록 긴장이 고조됐다.

2001년 1월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4자회담이 카이로에서 개최됐으나 유혈사태의 원인에 대한 견해차가 커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은 인티파다의 중단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봉쇄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우선적 해체를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문제는 이들의 핵심쟁점이었다.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는 자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 예루살렘 관할권의 상당부분을 팔레스타인에 양보하는 대신 약 37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포기하는 내용의 미국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는 계속됐다.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박격포 공격을 감행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파괴하고 특공대와 헬기를 동원해 테러범을 색출해 암살하는 등 전략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2001년 美 정보부 CIA의 중재를 통해 양측이 정전에 합의한 바 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후 양측은 정전의 합의, 파기, 교전을 반복하면서 평화협상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피의 테러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지난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변화가 보이고 있기는 하나 전망은 어둡다. 2001년 총리로 당선된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평화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강경파의 도전에 직면한 아라파트 수반도 2004년 겨울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팔레스타인의 불만을 통제함과 동시에 이스라엘과 협상하기에는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다.

팔레스타인 과격분자가 민간인을 포함한 이스라엘에 대한 자폭테러를 자행하고 이스라엘은 테러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군 병력을 투입하는 등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가자지구 내의 충돌이 격화됐는데 이로 인한 인명피해가 수천 명을 헤아릴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폭테러를 막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엄격한 통행금지와 통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자치지역의 주요지점에 통제소를 설치해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또 팔레스타인 테러단체 지도자와 폭탄지도자 검거 및 사살에 중점을 두어 2002년 헬기 등을 동원한 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전초기지 이스라엘, 그들의 뒷거래

이에 관해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나 ‘평화 유지’ 혹은 ‘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이라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군 병력 지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의 국가적 테러에 대한 지원과 전쟁은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한 부도덕한 전쟁범죄일 뿐’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자료와 연구조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점령지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티파다는 2000년 9월 29일 시작됐다. 이틀 후인 10월 1일 이스라엘은 미국 헬기를 이용해 아파트 등 민간시설을 공격했고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공격은 이틀 동안 계속됐고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아이들이 돌을 던졌을 뿐 전혀 발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후인 10월 3일 당시 美 클린턴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전투용 헬기를 보내 최대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언론에서는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미군의 군사 기지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이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전초기지라는 점 때문이다. 또 이스라엘이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터키처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중동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지만 팔레스타인은 힘도, 돈도 없으므로 미국은 그들을 외면한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겨냥하고 있는 악의 축이며 오랜 세월 중동 지방 전역에서 군사행동을 같이 하며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해왔다.

-유혈 분쟁, 그것이 남긴 것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강한 저항으로 촉발된 팔레스타인 분쟁은 민족, 영토, 종교, 분리와 독립 등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들의 영토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추방함으로써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의 분쟁 등을 파생시켰고 중동지역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무장테러 장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 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서로의 실체와 공존 모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을 희생시켜야 끝이 나는 분쟁이다. 이제 양측은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실체를 인정하는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유엔(UN)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지도적 국가들의 객관적이고 적극적인 중재가 필요하다. 역으로 말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세계 평화체제의 판이 달라질 수 있다. 과거 아랍 국가들의 경우 이 분쟁의 과정에서 석유를 무기로 내세워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적인 석유 위기를 몰고 왔다는 점에서 볼 때 향후 세계경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중동의 석유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역시 이 분쟁의 결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등 여러 유엔 활동에 한국의 참여도 요청되고 있으며 현재 이라크 파병 규모 면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어 이 지역에 대한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김영은 기자

자료출처 : KIDA 한국국방연구원

노엄 촘스키 『권력과 테러』 양철북, 2003

[ⓒ 시사투데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