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당당하기 위해 바르게 들이댄다. 가수 김흥국

박지혜

news25@sisatoday.co.kr | 2006-03-02 18:30:07

김흥국_2

으아~! 들이대~!

스스로 당당하기 위해 바르게 들이댄다. 가수 김흥국

식지 않은 10대 가수의 인기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수 김흥국(46). 남녀노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만약 김흥국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을 ‘외계인’이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상황에 ‘으아~’로 시작해 ‘으아~’로 끝내는 별난 남자. ‘으아~’라는 단어가 탄생함과 동시에 그는 전국에 ‘으아~’ 열풍을 일으켰다.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는, 다방면에 딱딱 들어맞는 매력적인 남자가 바로 김흥국이다.

김흥국, 가수다

그의 가수 생활 20년. 그 기간 동안 그의 앨범은 5장이다. 다른 가수들에 비하면 턱 없이 아니 가수치고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발표한 음반이 적다. 음반 발표 계획은 없냐고 묻자,

“으아~ 앨범 자꾸 내서 뭐해, 으아~”하며 웃는다. 가수가 앨범 발표를 거부하다니 역시 김흥국이다. 하지만 가수의 본분을 잊어서 한 말은 아니다. 가요시장이 침체 분위기이고 현재 역임하고 있는 홍보대사나 각종 활동이 많다보니 잠시 미룬 것뿐이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소리 소문 없이 ‘독도는 우리땅’의 정광태씨와 함께 싱글 앨범 ‘독도로 날아간 호랑나비’와 ‘Soccer Dance’로 2장의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두 앨범은 조용히 들어갔다. 아쉽기도 할 터이지만 그는 일찍이 앨범 판매 결과에 대해서는 달관했나보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홍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수의 본분을 잊지 않고 3월 월드컵 응원가를 녹음까지 마쳤다. 하지만 바쁜 홍보위원 활동으로 응원가를 홍보할 기회가 없자 그의 응원가는 자연스럽게 묻혀졌다. 그에게는 특히 아쉽기만 한 앨범이었다.

아버지의 콧수염, 나의 콧수염

그에게서 콧수염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면 대화의 진행 자체가 어렵다. 마주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의 콧수염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인간 빗자루’라고 해요. 콧수염 때문이죠. 제가 봐도 제 콧수염이 희한하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이 콧수염을 자를 수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하자 당체 그러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의 콧수염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황달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한다. 콧수염을 기른 농군이었던 아버지는 성격, 생김새가 아닌 콧수염으로 어린 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훌륭하신 아버지셨죠. 법 없이도 사는 분이였으니까요. 그런 아버지를 보고 내가 어른이 되어도 절대 콧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아뿔싸. 무명시절 단 몇 분의 방송출연을 위해 그는 굳은 결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야 했다. 마치 나무 한 채 없는 민둥산이었고 민대머리였다. 방송 촬영은 기억도 나지 않고 오로지 분장실에 콧수염 없는 자신의 모습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요즘도 그의 콧수염을 타이틀로 해 거액의 CF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그는 정중히 사양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개성 표현으로 콧수염을 기르지만 그에게만은 특별한 콧수염. 무명시절 방송출연을 위해 자른 콧수염이 아직까지도 불효라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늘 죄송하단다. 그리운 아버지. 요즘도 아버지가 계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다.

진솔한 에세이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

‘세상을 더욱 바르게살기 위해’ 이 한마디가 그의 에세이집 발간 이유다. 제목만 보고 단순히 방송에서 한 실수만을 모아 놓은 실수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단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더욱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재미와 감동이 함께 어우러져 잘 엮것다.

기러기아빠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외로움도 많이 느꼈고, 뭔가 하나 남기고 싶은 생각에 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난했던 어린시절부터 무명시절의 생활, 결혼, 방송생활, 지인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와의 만남이 수록되자 이 책은 연예부보다 정치부에서 더 관심을 보였다. 그 당시 대선 이후 잠시 속병을 앓았던 그에게 정치부 기자들의 관심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본 기자가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의 가수 초반 시절의 이야기였다. 찬밥보다 서러운 무명시절 빈털터리로 낙원상가를 돌아다니고, 벤치 등받이 틈새로 얼굴 갖다대어 몇 장 찍은 사진으로 앨범을 낸 이야기들. 첫 스케줄이 잡힌 날 어스름을 피우고 미소에는 신나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이야기들까지 그의 성격 그대로, 모습 그대로 술술 풀어 놓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늘 열심히 방송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독립군으로 열심히 뛰었지만 돈만 보고 달리지 않았어요. 돈 안 되는 홍보대사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죠. 그러니 지금도 멋있게 방송 생활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돈도 벌어야 한단다. 그동안 해병대며 불교, 축구 등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빠져서 가족들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미안해 잠시나마 가족들이 좀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꿀 수 있게 15살 아들 동혁이의 뜻에 따라 호주로 보낸 후 3년의 고단한 기러기아빠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 대부분 밖에서 생활하며, 돈을 벌기 위해 방송활동에만 집념해야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그 말 속는 분명 가족에 대한 진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졌다.

그가 지금 가장 학수고대하고 있는 일이 오는 2006 독일 월드컵이다. 올해는 방송 생활에만 전념하려고 결심했지만 축구팬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대한민국 축구사랑 모임 회장예요. 그러니 축구팬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동호회 회원들이 자비를 들여 독일에 갈 계획예요. 저도 함께 가야죠.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를 것 같은데 마음만 먹으면 독일에서도 방송할 수 있으니까(웃음)….”

축구하면 김흥국, 김흥국하면 또 축구다. 국민들이 열광할 때 함께 동참하는 그가 어찌 서민적이지 않을 수 있으랴. 정식 팬클럽은 없지만 작은 식당 한 곳을 가도 팬이 존재하는 사람이 바로 김흥국이다.

그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운영한지도 벌써 7년이 다 되어 간다. 초등교육이 중요하다고 그가 형편이 어려워 원하던 축구선수의 꿈을 접은 것도 초등학교 때였다. 그때의 경험으로 그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꾸준히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여러분, 많이 웃으세요. 이것저것 문화생활도 하시고 여러 장르의 음악도 꾸준히 들으시고요. 웰빙시대라고 한창 떠드는데 자기 몸 하나는 챙겨야죠. 늘 좋은 생각과 더불어 열심히 웃으세요.”

라디오 DJ, 일요일 아침 웃음 바이러스의 선두주자로 늘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자신의 삶에 당당하기 위해 그의 유쾌한 발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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