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청계천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
박지혜
news25@sisatoday.co.kr | 2006-02-14 16:56:20
7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대문 운동장. 승패에 울고 웃던 기나긴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는 경기질서 안내판과 멈춰 선 전광판 시계만이 화려했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명승부가 펼쳐지던 그라운드는 주차장과 버스 정류장으로 변했고 운동장 트랙의 반을 따라 중고품 만물시장으로 불리는 동대문 풍물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16일은 청계천 복원공사로 밀려난 황학동의 영세상인들이 서울시와의 지루한 다툼 끝에 새 터전을 마련한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름대로 기념일이라 할 수 있어 몇 일전부터 각종 행사 준비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당일에는 신나는 음악과 웃음꽃이 피어야 할 터인데 영세상인들에게는 그리 반가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표정을 줄곧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난날 시장의 정겨움보다는 안쓰러움이 앞선다.
청계천 복원으로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
“오늘 개시했어요? 개시했으면 끝나고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요즘 풍물벼룩시장 상인들의 인사다. 그렇다고 개시한 상인들이 멋들어진 술상 앞에 앉는 것도 아니다. 안주 없이 쓰디 쓴 소주 한 잔으로 고달팠던 오늘 하루를 위로한다.
청계천 복원 전 주위 상권은 오랜 시기 이곳에서 거주하거나 생계를 유지해온 상인들과 노점상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결과물이었다. 비록 국가로부터 법적 허가를 받지 못해 마음 조리며 상점을 지켰지만 업종들이 군락을 형성하거나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촘촘히 엮인 그물망 속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생활 터전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의 상인들은 한 달 공과금은 물론 밥벌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청계천에서부터 20년 넘게 노점상을 운영했던 어느 상인은 “이곳으로 옮기고 난 후 제대로 된 생활은 기대하기 힘들다. 하루에 1, 2만원의 수입으로 만족해야 한다. 개시도 못하는 날이 태반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서울시에서 하루 빨리 대책 마련을 해주길 바랄뿐이다”라며 지금의 심정을 토로했다.
풍물벼룩시장 구경 좀 해볼까?
1,000명의 상인들은 깊은 한숨 속에서도 넓지 않은 좌판에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중구 황학동 시절의 명성을 착실하게 잇고 있었다.
동대문 운동장의 반 트랙을 따라 길게 늘어선 좌판에는 옷가지, 골동품, 신발, 공구 등 판매하는 제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고, 좌판 배열의 원칙이 없다보니 성인용품도 넉살 좋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 추억이 담긴 양은 도시락, 옛날 화폐, 등잔대와 장롱과 같은 공예품, 병풍과 액자 등의 물품들은 보물찾기를 하듯 중?장년층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녹슨 트럼펫에서 바이올린까지 악기 만물상이 따로 없다.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는 향수를 자아내는 기상나팔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 개 이상의 상품을 묶어 1,000원에 판매하는 생활용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주인과 말만 잘하면 흥정의 재미도 보고 다른 상품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풍물시장이라고 저렴한 가격의 상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윤기 흐르는 모피코트는 300만원을 호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은 1만원대 제품들이다.
상가를 둘러싸고 음식점들도 줄지어 있다. 화려하게 메뉴판을 꾸며 놓은 곳도 있고 이름 모를 상점도 많다. 우동가게, 대폿집, 밥집 등. 하지만 이 많은 상가들의 공통점은 가격이 저렴하고 양도 넉넉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의 발길도 많다. 우리나라로 여행을 와서 오래된 물건들도 많고 저렴한 풍물벼룩시장 안을 구경하다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마다 신기한 상품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고 이야기하는 그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환경 조성, 홍보 등 대책마련 급선무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가깝고 수시로 운행하기 때문에 이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손님들의 방문이 잦을 듯도 하지만 상인들은 “그렇지도 않다”며 손을 내젓는다.
개장 직후 사람이 많이 몰리던 일요일을 기준으로 하루 10만 명 선이었던 방문객 숫자가 2004년 겨울 3만 명까지 떨어졌다가 지난해 10월 청계천 복원 후 다시 그 숫자가 늘었지만 유난히 추운 올 겨울은 손님들의 발목도 꽁꽁 열려 상인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만 간다.
40년 넘게 청계천 주변에서 노점상을 운영했던 한 상인은 “청계천 복원이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곳에서 생계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이들과의 합의 과정을 통해 생존권을 가장 우선시했어야 했다.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서울시에서는 동대문운동장을 내주며 관광명소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며 한탄해 했다.
농업회사법인 김선유 농인 대표는 “20일부터 27일까지 설맞이 북한어린이돕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결식아동도 돕고 풍물시장도 홍보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며 “과거 서울의 자랑이 이제는 환부로 자리잡혀 가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서울시에서 약속한 ‘관광명소’로 만들어 주려면 청계천에서 풍물시장까지 이어지는 길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행사로 노점상들이 도시 발전의 그늘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시민사회의 하나의 축으로 발전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전국노점상총연합 장용모 대외협력국장은 “서울시는 장소 제공이외에는 약속을 지킨 게 없다. 전기공사와 지붕 차양 막 공사도 상인들이 장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1인당 70만원씩 무려 7억~8억씩 거둬 이뤄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러했겠는가”라며 원망스런 말로 입을 열었다.
“서울시에 여러 번 협조 공문도 보내고 운동도 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있다.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노점상 자체가 불법이다 보니 쉽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일정 기간 약속을 해주고 그 기간 동안 적극적인 지원이 있길 바란다. 여기 상인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사람들이라 충분히 관광명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 보니 능력발휘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수요가 없다보니 상인들도 새 상품을 가지고 올 형편이 아니어서 방문객들도 늘 같은 상품을 보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 일정기간 약속을 해준 후 홍보도 이뤄지고 외벽이나 주위 시설을 새롭게 단장을 하는 등 환경 조경에 힘써서 처음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되살아난 청계천 물길에 관심이 쏟아지는 지금, 화려한 복원 뒤에 가려진 소외된 이웃과 주목받지 못하는 이야기들. 47년 만에 되살아난 청계천은 누구를 위한 선택이었을까? 복원된 물길과 함께 청계천의 역사와 삶도 함께 복원될 수는 없었을까? 아무래도 지난 황학동 시절의 낭만을 되살리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박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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