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그날의 아침. 그리고 인권침해의 현장

김기횡

news25@sisatoday.co.kr | 2006-04-11 17:30:55

‘건국훈장/건국표창’을 받았던 4.19회 회원 김기일 목사(76세) 건국훈장·표창 받은 4

4.19당시 데모군중대표의 한사람으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면담, ‘민의’를 전하는 등 독재에 항거하는 대열에 참여, 5.16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건국표창’을 받았던 4.19회 회원 김기일 목사(76세)가 2006년 3월 3일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김기일 목사 인권피해 관련’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했다.

동아일보(1975년4월19일자)는 김기일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한 바 있다.

지난 70년 4.19회의 간부직을 맡기도 했다는 김씨는 ‘유신헌법을 비롯, 만연되고 있는 부정부패 학원 종교의 탄압사태 일부 부정선거 고문정치 등은 미력하나마 내가 참여했던 4.19의 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어 양심상 건국표창증을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서 지난 63년 4월 19일 다른 유공자 1백70명과 함께 받았던 건국표창증을 총무처 의전과에 놓고나왔다.

4.19에서 대통령 下野까지

김기일 목사는 당시의 상황과 감격 그리고 강박감을 회고했다.

당시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소재 동묘앞 노점 포장마차(토스트, 라면, 국수, 김밥 등 판매)에서 부인(조말련 여사)을 도와주며 음식물 배달까지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던 중이었습니다. 2남2녀(종춘, 세언, 미내바, 동애)의 가장으로써 평범하게 살아가던 당시 찌든 가난으로 인해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서울시내 20여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약 3년여 동안 주경야독,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당시 ‘고려대학교’에 다니는 후배들과 지인들이 많아 주로 ‘고려대학교’를 찾아가서 ‘비공식 청강생’으로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0년 경남 마산에서 ‘자유당 장기집권 음모’ 의혹이 있는 ‘3.15 부정선거’로 인해 수많은 마산시민과 분노한 학생들이 “내 표를 내놓아라!”, “부정선거 다시하자!”,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할머니댁에 와있던 ‘김주열(당신17세)’군이 4월11일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처참한 시체로 ‘마산앞바다’ 중앙부두 앞에 떠올랐다는 뉴스를 알게 되었습니다(부산일보 1960년4월12일자). 비참한 사건은 ‘제2의 마산사건’으로써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으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시위의 불꽃이 확장 되었습니다. 본인은 당시 각 언론을 통해 ‘김주열’군의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피 끓는 젊은이로써 분노가 심장을 치밀었습니다.

평소에 본인은 ‘인권 · 자유 · 민주 · 평화 · 복지 · 박애’를 신봉하는 사람인데, 당시 ‘자유당정권’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점점 악화일로에 있는 위태로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1960년4월18일 ‘고려대학교’ 집회 때부터 데모대열에 참석하였으며, ‘정의감’에서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일주일이상 잠도 제대로 못자고 데모대열에 합류한 본인은 1960년4월26일 아침 7시경, 당시 계엄군 기갑부대 참모장인 ‘이석봉장군(육군준장)’과 기갑부대장 ‘조재미장군(육군소장)’에게 “군대는 국민의 편이니 국민의 요구를 대통령이 들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장안이 불바다가 됩니다. 그리고 3.8선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빨리 이승만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조재미 기갑부대장’은 ‘송요찬 계엄사령관(당시 육군대장)’에게 즉각 긴급 상황을 무전기로 보고하면서 “각하! 서울운동장 앞에서 시민대표와 얘기를 하는데 대통령 만나기를 강력히 원합니다”라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육군본부에 가서 먼저 신원조사를 마치고 절차를 밟아 그분들을 경무대로 데려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李承晩大統領 만나 下野 권유

조재미 기갑부대장의 안내로 26명의 데모군중 대표들과 함께 서울시 용산구 소재 ‘육군본부’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원조사’를 모두 마친 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갔습니다. 육군본부에서 중앙청 경무대까지 도착하는데 약3시간이 걸렸으며, 경무대는 오전 10시3분경에야 도착했습니다. 당시 본인을 포함 27명이 모두 참석한 ‘경무대’에서 본인을 포함 5명이 호선되었고, 이후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대통령각하께 드릴 말씀을 먼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첫째-전국의 학원 문을 열어 달라(학원 정상화), 둘째-3.8선을 잘 경계해 달라(철통방위), 셋째-대통령은 부정선거 했으니까 하야(下野)해 달라(대통령 하야), 넷째-부정선거 획책한 주범들을 고발하고 혁명재판에 붙여라(부정 선거자 처벌), 다섯째-국제적인 외교를 정상화시켜 달라(외교정상화)”라고 국민들의 요구사항들을 먼저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본인은 대통령께 “3.15 부정선거로 당선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여 새 정권이 들어서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입법부에서 새로운 헌법을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약 17분 동안에 걸쳐 대통령과의 면담 중 ‘매카나기 미국대사’와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이 갑자기 찾아와 면담이 중단될 뻔 했는데, 대표 중 본인이 책상을 힘차게 치면서 “이 시각에는 외국의 대통령이 와도 안 됩니다”라고 고함을 쳐서 대통령과 면담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통령께 “국민이 하야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배석했던 ‘허정(당시 외무부장관)’씨에게 “하야란 뜻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허정장관은 “대통령하야란 뜻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통령은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국민에게 웅기(雄氣)가 돌아갔어. 우리 국민이 원한다면 나 이승만 개인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기꺼이 물러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씀이 떨어지자 본인과 함께 대표들은 대통령의 손을 동시에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대통령은 “땡큐”를 3번 연발했고 4월26일 오전11시경에 대통령은 떨리는 음성으로 “나 이승만은 국민의 요청으로 대통령직을 下野합니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건국훈장 총무처에 반납

1975년 김기일 목사는 유신헌법과 군국주의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4.19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다고 생각,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국가에 반납하게 된다. 김기일 목사는 당시 상황과 감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훈장을 반납하기 전에는 본인의 방에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걸어놓고 볼 때마다 양심상 부끄럽고 하늘이 두려웠으며 가슴이 떨리는 마음을 달랠 수 없었습니다. 1975년 1월부터 4월10일까지 아내에게도 숨기면서 약 100여 일 동안 ‘유신헌법 결사반대’등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약3,000여장의 ‘4.19혁명 정치 백서’를 작성했으며, 이를 70여장으로 압축하여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함께 대한민국 정부 총무처 의전과에 1975년 4월19일 오전 10시경에 반납했습니다.

김기일 목사 인권피해현황

이일로 인하여 새로운 역경과 고난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김기일 목사의 증언이 계속된다.

1975년4월26일경 종로3가 소재 동묘앞 노점상 포장마차에서 하루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여 새벽1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새벽2시경 가죽잠바를 입은 건장한 청년 2명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알몸상태였으며, 누워있는 이불을 발로 걷어차고 이리저리 구둣발로 걷어차여 집사람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에게는 옷을 입힌 다음 수갑을 뒤로 채운 채 종로경찰서로 연행하여 독방에 강제로 감금시켰습니다. 이때가 1975년4월26일 새벽3시경입니다. 이 10여 일 동안 심한 고문조사를 받았는데, ‘강제구금’ 후 약3-4일 후에는 5-6명의 수사관들이 밤잠도 안 재운채로 약1시간씩 번갈아 가면서 ‘기획수사’를 했으며, 온갖 회유와 공갈협박 등으로 ‘정신타박 · 정신고문’을 시키면서 본인을 ‘정신병자’로 위장하려 했습니다.

약10여 일 동안 고문조사를 받은 후 두려움과 공포감속에 ‘시립 응암동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시립 응암동 정신병원’에서는 본인에게 약물을 과다 복용시켰고, 그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만들었으며,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정신병원에서는 약물로 본인을 폐인으로 만들려고 한 의혹이 있습니다. 본인은 2년여 동안 3차례에 걸쳐서 ‘시립 응암동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 · 퇴원을 반복하면서 ‘인권피해’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면회 온 4.19회원 중 한사람인 김종윤씨는 시립 응암동 병원장에게 “도대체 왜! 김기일씨 면회를 안 시켜 줍니까? 부정부패와 불의.독재를 물리친 것이 4.19회원이고 4.19정신인데, ‘자유와인권.민주주의.정의’가 송두리째 짓밟히고 망가지는데 어째서 면회를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말했더니, 병원장은 “상부의 명령이 있어서 면회를 시켜주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정신병원에서 2년여 동안 온갖 고초와 고통을 당하고 퇴원한 후에도 정보부의 ‘주요사찰’대상으로 지목, 동태를 파악하면서 ‘인권침해’의 의혹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집에 갔으나 사랑하는 부인(조말련 여사)은 ‘피해망상증’으로 본인을 받아주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전전하며 짚더미와 나무판자. 박스 위에서 잠을 자면서 비참한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가 되다.

한동안 세월이 흘러 1980년10월30일 제주도 관음사를 들러 부산에 도착. 이때 김진규 목사를 만나게 된다. 응암동 어느 교회에서 김진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다.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전국교회를 다니면서 2년여 동안 ‘전도집회’ 활동을 한다. 그 와중에 사당동 소재 총신대에서 신학공부를 하게 되고 1986년 목사 안수를 받는다.

김기일 목사는 “만만 만고에 대역죄인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속죄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기도한다.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우연한 기회에 이준상 회장(자랑스러운한국인회,51세)이 김기일 목사의 사정을 듣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5년10월3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소사동 연립주택. 국가를 위해서 내 몸 던져 불태우고, 관(부활)속에서 나라의 안녕과 남북통일,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 이준상 회장은 오늘의 이날을 위해서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케 했는데’. 감격스런 대접은커녕 인권탄압을 받게 된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쌓여 33일 동안 김기일목사와 동거, 16페이지에 달하는 ‘김기일 목사 인권피해현황’을 만들고, 나라에 꼭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면서 명예회복과 진실규명 작업에 착수한다.

현재 김기일 목사는 보증금 없는 30만원 월세 집에서 기거한다. 원래 보증금 300만원을 독지가가 도움을 주었는데, 밀린 월세 차감으로 보증금이 없는 상태다. 생계비는 독거노인 지원비 32만원, 4.19국가유공자 16만원, 6.25참전 7만원, 교통비 45,000원 등 595,000원이 수입의 전부다. 월세 및 각종 공과금을 내면 모자란다. 그러나 주위의 천사 같은 온정이 있기에 가능하다. 특히 민말순 여사(안양우편물집중국 근무)는 7년 동안 박봉을 쪼개어 김기일 목사를 돕고 있다. 그 외 구광서부총재(사단법인 남북통일운동본부), 이준상 회장, 이승남 총장, 김정애 권사가 매주 모임을 갖고 후원활동을 펼쳐가고 있다.

2005년10월3일에는 ‘독거노인 김기일 목사님 양심 탄원서’란 제하의 전단지를 배포하고, 12월14일에는 ‘독거노인 김기일 목사님을 도웁시다’란 제하의 전단지를 이웃에게 배포하는 등 후원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이준상 회장 010-4536-4985) 또 2005년10월26일에는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묘소를 참배했고 마침 박정희 대통령 서거 26주기로 의미 있는 행사를 주관한 박지만씨와 화해의 악수도 하게 된다. 그리고 효창공원, 수유리 4.19묘역 등을 참배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했다.

현재 자랑스러운한국인회 이준상 회장이 후원자 대표로 김기일 목사의 인권피해현황을 알리고 명예회복을 위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바라는 것

김기일 목사(010-2702-7333)와 그의 후원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길 희망하고 있다. 본인과 본인가족의 인권 상실로 인한 ‘인권피해’, 생존권 박탈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와 30여 년 동안 ‘피해망상증세’로 살아온 ‘정신적인 피해’ 그리고 송두리째 앗아간 한 맺힌 인생의 ‘젊음과 건강’마저도 충분히 보상해주길 바랍니다. 또한 본인과 본인가족과 같이 억울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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