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쌩얼’ 열풍
박지혜
news25@sisatoday.co.kr | 2006-08-25 15:01:32
-외모지상주의의 극단은 아닌가
‘화장빨’은 가라, ‘쌩얼’로 승부한다. 화장하지 않은 밑바탕 얼굴을 뜻하는 ‘쌩얼’. 10대들이 인터넷에서 장난스럽게 쓰던 이 말은 요즘 들어 두터운 화장을 벗어 던진 자연미의 대명사가 됐다. 네티즌들이 분장을 약하게 한 스타들의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들을 캡처하거나 편집해 맨얼굴이라고 주장하며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에 올려 대량 유통시키면서 스타의 맨얼굴 열풍은 대단한 열기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송혜교, 김희선, 전지현, 전도연, 황신혜 등 여자 톱스타 연예인에서 시작된 맨얼굴 사진 공개 열풍은 노현정 등 방송인으로 범위를 확대하더니 일반인 맨얼굴 사진 공개 열기로 계속되고 있다. 또한 안경을 벗은 유재석 등에 이르기까지 남자 연예인의 쌩얼 공개로 이어지고 있다.
‘쌩얼미녀’란 말까지 생겨나면서 대한민국을 들끓게 만드는 쌩얼 열풍.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외모지상주의의 극단으로 보는 시각 또한 만만치 않다. 우리 사회의 ‘쌩얼 열풍’을 해부해 봤다.
▷쌩얼 생각1=“아무나 쌩얼로 다닐 수 있나”
“그 병원 가보니까 간호사부터 의사까지 모두 쌩얼이더라고요. 소문난 병원이라 좋은 줄은 알았지만 확실히 다르긴 달라요.”
노진영(가명·29·여) 씨는 다음 달 말로 ‘소개팅’을 미뤘다. 직장에서 자타 공인 ‘얼짱’인 그녀지만 ‘공사 중’인 얼굴로 남자를 소개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여름휴가 동안 레이저 박피 수술을 받았다. 회복까지는 6주. 수술을 결심한 데에는 “나이 드는 게 보인다. 피부는 못 속이지”란 회사 여자선배의 말 한마디가 컸다.
하지만 노 씨는 수술 후에라도 ‘쌩얼’로 소개팅에 나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쌩얼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하죠. 쌩얼은 아름다움에 있어 피부의 중요함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닌가요. 정말로 화장을 지운 채 나간다면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요.”
▷쌩얼 생각2=“귀찮아서 안 한 거니까 아프냐고 묻지 말아줘”
회사원 서 모(25·여) 씨는 ‘쌩얼’ 열풍에 때문에 성가실 때가 많다. 땀이 많이 나는 편이라 평소 여름에는 로션에다 옅은 립스틱 정도만 바르고 외출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쌩얼’이 유행한 후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서면 오히려 ‘아프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는 일종의 비아냥거림인데 그때마다 적잖이 불쾌해진다.
“때론 ‘너 (얼굴에) 자신 있냐?’란 이야기도 듣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요. 그냥 화장하기 귀찮아서 안한 것뿐인데 마치 못할 짓 한 것 같이 바라보는 시선이 짜증스러워요. 쌩얼이 자기가 미인임을 증명해 보이는 수단인 것처럼 변질돼서 그런 거예요.”
편하고 자연스러운 게 좋아서 화장을 안 하는 여성들이 ‘쌩얼 열풍’ 이후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게 된 이상한 형국이란 얘기다.
■ 쌩얼 열풍에 피부과 고객 10~15% 늘어
맨 얼굴 피부미인을 꿈꾸는 여성들이 성형외과와 피부과에 몰리고 있다. 특히 최근엔 박피시장에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20대 고객’을 잡기 위한 병의원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일부 기업과 성형외과는 이제 ‘진정한 미인은 쌩얼로 판명난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며 맨얼굴처럼 보이게 하는 화장품, 잡티제거, 매력 있는 쌩얼 연출을 위한 피부 치료 등 쌩얼을 이용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실제 서울의 한 피부과가 올 4∼7월 4개월간 주름 치료를 위해 방문한 603명을 분석한 결과 40대 33.3%-20대 25.4%-30대 23.9%-50대 17.4%로 20대가 두 번째를 차지했다. 업계 관계자는 “쌩얼 열풍에 젊은 세대들이 병원을 찾으면서 고객이 지난해에 비해 10∼15% 이상 늘었다”고 귀띔했다.
치료방법은 어떨까. 요즘 젊은 세대가 많이 받는 시술은 주근깨와 잡티, 여드름, 점 제거로 일종의 박피수술이다. 이 중 폴라리스는 모공 주위의 늘어진 피부를 탄력 있게 만드는 데 효과적인데 여드름 방지 효과도 크다. 레이저와 고주파를 함께 이용하는 최신 치료법이다. 여드름 자국을 없애는 데는 브이빔 레이저, 제네시스 레이저, 벤티지 레이저가 사용된다.
주름 제거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시술로 유명해진 ‘보톡스’가 있다. 이른바 ‘다리미법’으로 통하는 서마지 리프트도 각광받는다.
서울 강남의 한 피부과 전문의는 “과거에는 나이 든 세대들이 주름을 펴는 보톡스 시술이 주류를 이뤘지만 쌩얼 유행 이후 여드름과 모공 등 피부 트러블을 잡아 달라는 젊은 세대들의 요구가 몰려 시술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연예계 쌩얼은 없다
‘쌩얼’의 유행은 ‘웰빙 열풍’과 연관이 있다.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웰빙이 맨 얼굴을 선호하는 풍토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화장이나 성형을 통한 ‘인공미’가 아닌 ‘자연미’를 원하게 된 것이다. 스타에 대한 대중의 신비주의와 호기심도 한몫 했다. 연예인의 맨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네티즌들의 심리에 스타들은 미니홈피 등을 통해 안 꾸며도(?) 아름다운 자신들의 얼굴을 하나둘씩 공개했다. 순위가 매겨졌고 찬사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치 ‘커밍아웃’처럼 ‘쌩얼’의 공개가 확산됐다.
하지만 연예계엔 ‘쌩얼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겉으로는 인위와 인조, 꾸밈의 문화와 분위기에서는 연출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날 것, 생생한 것에 대한 일반인의 욕망과 꾸미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예인의 욕구가 촉진시키고 있는 쌩얼 열풍의 본질을 살펴보면 결코 날 것,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매우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일부 연예인들은 자신의 맨얼굴의 사진 공개도 상품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편집이 개입된 일반인에 의한 스타의 맨얼굴 사진 공개 역시 이미 편집에서부터 변형의 작업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이다. 순수한 맨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인위성이 배제된 자연스러운 것, 날것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매우 인위적인 것이다. 성형이 매우 인위적인 측면을 직접적으로 들어내는 것과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은 것이다.
또한 동경과 완벽의 대상으로 여겼던 꾸며진 스타의 모습을 맨얼굴로 대체시키면서 나와 다르지 않다는 동일시의 감정을 느끼며 만족감을 맛보려는 대중의 심리와 심지어는 나와 멀리 있다고 느끼거나 완벽한 우상으로 여기는 스타의 맨얼굴 사진을 일반인보다 못하는 모습으로 연출해 역설적으로 통쾌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심리도 이러한 스타의 맨얼굴 사진 열풍을 지피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한 여자연예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 모(27) 씨는 “인터넷에 돌아다는 쌩얼 연예인 사진 중 진짜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파운데이션과 파우더, 옅은 눈 화장까지 아무리 못해도 전문가의 손이 15분 이상 들어갔을 때 가능한 얼굴들”이라고 했다.
■ “쌩얼은 외모 지상주의의 결정체” 비난도
인조와 인위가 판칠수록 사람들은 연출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 날것에 대해 강하게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이 바로 날 것,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는 맨얼굴의 연예인 사진 공개 열풍으로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했고 일반인들 사이에 쌩얼 열풍을 유행시킨 것이다.
경위야 어찌됐든 많은 사람들이 ‘쌩얼 열풍’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최근에는 ‘쌩얼’ 미인대회까지 생겼다. 오죽하면 ‘쌩얼’을 위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까지 생겼을까. 하지만 연예계와 우리 사회에 부는 쌩얼 열풍은 성형·얼짱·몸짱·동안 열풍을 거치면서 탄생된 ‘외모지상주의의 결정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 출신 방송인 안나 씨는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와서 한국 여성들 화장하는 것을 보고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분장 수준으로 기술도 뛰어났지만 화장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히면서 “베네수엘라에는 대부분이 ‘쌩얼’인데 한국에서는 ‘쌩얼’ 미모가 화제가 되는 것 자체도 우습다. ‘쌩얼’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 여성들의 지나친 화장 문화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쌩얼 역시 외모지상주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연예인들 사이에 일었던 쌩얼 열풍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을 공개한다는 차원을 떠나 이제 상당수 일반인들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화장과 성형 등 인위성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연예인들이 맨얼굴을 공개함으로서 또 다른 관심을 유도하는 하나의 기제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한국분장예술협회 관계자는 “해외 배우나 모델 중에 주근깨나 잡티 있는 얼굴을 그대로 노출하고 그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추세가 번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몸매부터 피부, 머리결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것처럼 변질되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또 “개인적으로 메이크업을 전공하긴 했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건강미와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된다는 상식이 우리 사회에서도 통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10대 외모지상주의 인식 개선 교육
‘외모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사회에 뿌리내린 지는 이미 오래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소녀들의 외모 지상주의는 심각할 정도다.
한국여성민우회는 보건복지부와 함께 10대 소녀들의 외모지상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러브 마이 보디(Love My Body·내 몸 사랑)’ 교육프로그램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 실시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미디어에 나타난 여성의 몸, 외모 지상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안의 외모 지상주의 드러내기, 내 몸 새롭게 인식하기 등 4개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활동극 등 4시간의 집중교육을 통해 ▲자기 가치를 재인식하고 자긍심 가지기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대해 성찰하고 다양한 모습 인정하기 ▲자신의 소중한 몸에 대해 바로 알기 ▲외모 지상주의를 유포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갖기 ▲사회·문화적 외모 차별에 대한 감수성 키우기 등을 가르친다.
지난해 서울·경기 지역 6개 학교 100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 뒤 가진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의 70% 정도가 “외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여성민우회는 오는 9월부터 서울·경기·인천·진주 지역 15개 학교 2000명으로 교육 대상을 확대할 예정이다.
시대에 따라 여성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는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시기이다.
-박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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