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투데이 장수진 기자] ‘자옥아’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고 이후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하며 달려 온 신세대 트로트 가수 1세대 박상철.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TV 예능프로 1박2일에서 출연자들이 불러 더 유명해진 ‘무조건’은 선거 유세가 있을 때면 후보들이 홍보용 가요로 단골로 사용하고 노래방에서도 인기곡으로 많이 불려지는 곡이다. 이어 발표한 ‘빵빵’이란 곡도 친숙한 멜로디와 가사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상철이 트로트 가수로써 대중의 사랑을 받고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치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더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가수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고 준비했기에 가수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일용직 잡부에서 노숙자 생활, 헤어디자이너 그리고 가수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가수를 꿈꾸다
강원도 삼척 출신인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일용직 잡부로 일해 모은 돈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어느 작곡가가 운영하는 작곡실에서 노래를 배우고 곡을 받기 위해 수 개월동안 기다리고 연습에만 몰두했다.
앨범을 낼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연습하며 기다린 시간은 그에게 아픈 경험만을 안겨줬다. 일용직 잡부로 일하며 모은 천만원이 훨씬 넘는 돈을 몽땅 털리고 앨범은커녕 노래 한 곡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쓴 맛을 먼저 경험해야 했던 그는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됐다.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사업에 실패해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도 보고 이런 저런 사연을 갖고 노숙자가 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에겐 다른 무엇보다 값진 젊음이라는 밑천이 있었다. 여기서 포기하기엔 젊음이 너무 소중했다. 무엇을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면 좀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에는 남자 미용사가 드물었는데 그는 미용사가 되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는 미용사가 되었다.
헤어디자이너가 되다
그가 헤어디자이너가 된 것은 경제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처음 미용실에 들어가 보조로 일하며 일을 배울 때는 남자 미용사의 손길을 고객들이 불편해 해 한 달도 못가 쫓겨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남자 미용사가 드물었던 시대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미용실에 취직한 그는 보조로 일하면서 밤에는 혼자 머리 손질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믿었다. 남들이 여덟 시간을 자면 네 시간 자면서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50등이 10등 안에 들 수 있고 거기서 더 노력하면 5등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단숨에 성공하겠다는 생각보다 조금씩 꾸준히 하다보면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노력을 계속했다.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어느 날 미용실이 바빠서 일손이 부족했고 그냥 가려는 손님을 그가 붙잡았다. 그렇게 머리 손질을 하자 손님이 만족했고 모두들 그의 솜씨에 놀라워했다. 밤잠을 포기하고 혼자 꾸준히 연습한 결과 그는 그에게 다가온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헤어디자이너가 되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작곡가 박현진을 만나다
그는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개업을 하고 헤어디자이너가 되어서도 노래를 놓지 않았다. 그에게 또 기회가 왔다. 전국노래자랑 삼척편에 출연하게 된 것인데 거기서 수상을 하고 ‘자옥아’, ‘황진이’, ‘무조건’의 작곡가 박현진씨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후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미용실이 쉬는 날이면 서울 작곡실로 찾아가 노래를 배우고 다시 가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준비했다. 새벽 첫차를 타고 5시간이 넘게 걸려 서울에 도착해 작곡실까지 또 2시간 걸려 찾아가 하루 종일 연습하고 곡 만드는 것도 옆에서 배우고 막차를 타고 삼척으로 향했다.
그런 시간이 몇 년이 흘렀다. 그에게 맞는 곡이 나올 때까지 그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에 인내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홍보하다
첫 앨범이 나오고 그는 혼자 앨범을 홍보하고 다녔다. CD를 들고 다니며 방송국을 기웃거렸고 동대문, 남대문에 다니면서 CD를 돌려도 사람들은 외면했다. 방송국에서 쫓겨나기도 많이 했다. 당시는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비하하고 대중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던 시기였다. 첫 앨범의 ‘부메랑’이란 노래는 트로트에 락을 접목한 곡이었는데 시대를 앞서 갔던 곡이었는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했다. 가수로써 알려지지 않더라도 일단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TV에 나가 활동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좋았다. 재현 연기, 리포터, 성우까지 주어지는 일은 다 했다.
자옥아, 그를 알린 노래
노력하고 성실하게 가다보면 기회는 온다. ‘자옥아’란 노래가 대중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황진이’, ‘무조건’ 등 많은 노래가 히트하면서 트로트 가수로 우뚝 서게 됐다. 그가 데뷔하고 이후 장윤정, 박현빈 등 신세대 트로트 가수가 나오면서 트로트 가요가 다시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는데 박상철은 신세대 트로트가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은 전통 트로트에 락을 접목한 락 트로트, 세미 트로트로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자옥아’로 인기를 얻게 된 박상철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특유의 성실함으로 노력한 결과 이후 꾸준히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요즘엔 인천시, 영주시 홍보대사와 산림청 홍보대사까지 맡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늘 준비하고 있어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다고.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트로트 가수로 인정받고 사랑 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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