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투데이 박미라 기자] 일제 강점기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와 유가족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三菱重工業株式会社)을 상대로 제기한 3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이는 종전 판결과 유사한 것으로 사실상의 전부 승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광주지법 민사1단독 김현정 판사는 8일 오전 김영옥(83) 할머니와 고(故) 최정례(사망 당시 15세)씨의 조카며느리 이경자(73)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김 판사는 주문을 통해 "미쓰비시는 김 할머니에게 1억2000만원을, 이 할머니에게는 325만여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당초 김 할머니는 미쓰비시를 상대로 1억5000만원을, 이 할머니는 3000만원의 손해배상금액을 청구했다.
앞선 같은 유형의 판결에서는 일제시대 강제노역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에게는 1억5000만원을, 생존 피해자에게는 1억2000만원의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의 이날 판결은 1940년대 원고들의 미쓰비시의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다. 단 이 할머니에 대한 배상금액이 청구액보다 현격히 낮아진 것은 사망한 최정례씨와의 상속 관계 때문이다. 최씨에 대한 배상금액은 1억5000만원으로 인정했지만 4대에 걸친 가족 간 상속 지분을 나누다 보니 이 같은 금액이 산출된 것이다.
소송을 이끌어 온 한 변호인은 "이 할머니에 대한 배상금액이 기계적으로 산출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법원도 종전 판결의 기준 등을 토대로 상당한 고민끝에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여수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께 미쓰비시로 동원됐다. 김 할머니는 당시 '돈을 벌고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일본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현실은 군수공장인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강제동원이었다. 미쓰비시 공장의 노동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고됐다.
특히 지진과 폭격의 공포는 지금도 괴로울 만큼 끔찍한 기억이라고 앞선 재판에서 증언했다. 김 할머니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날 선고 재판에 함께하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같은 시기 나주에서 동원돼 그 해 12월 일본 지진에 목숨을 잃은 최씨의 유가족이다. 그가 이번 소송에 참여한 이유는 사랑하는 어린 딸을 잃고 평생 한을 품고 살았던 시할머니(최씨의 어머니) 때문이다. 이역만리에서 억울하게 딸을 잃은 이후 이불조차 덮지 않았던 시할머니는 명절이면 사망한 딸의 제사상을 차려 늘 대문 밖에 내놓았다고 이씨는 앞선 재판에서 진술했다. 이 같은 시할머니의 한과 시고모의 억울함을 대신해 소송에 나서게 된 것이다.
지난 2015년 5월22일 제기된 이번 3차 소송은 1년6개월 만인 지난해 11월22일 첫 재판이 열렸다. 이후 세 차례 변론 기일이 진행됐으며, 2년3개월 만에 1심 판결이 내려졌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5~6월 광주·전남·대전·충남 지역에서 당시 13~15세 어린 소녀 약 300명을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했다.
이들은 해방이 될때까지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중노동을 강요당했다. 광주·전남에서 동원된 6명의 소녀들은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 지진 당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김재림(87) 할머니 등 4명이 2014년 2월27일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소송은 오는 11일 선고가 예정돼 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총 3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양금덕(89) 할머니 등 5명이 제기한 1차 소송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승소,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전국적으로는 모두 14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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