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사업 정면돌파’ 카드를 빼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요즘 경영수업까지 잠시 미뤘다. 현 회장은 올 상반기 세계경영연구원의 AIGMP과정을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착실히 수강한 데 이어 지난주 개강한 ‘세계경영명저순례’라는 1년짜리 강의를 들으려다 포기했다. 모 과학대학원에서 다른 강좌를 신청했다 북측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 등 강경한 대응을 계속하자 수업 자체를 아예 미룬 것으로 전해진다.
장고에 빠진 현 회장은 특히 지난 12일 ‘국민 여러분께 알리는 글’을 통해 북측의 김윤규 부회장 복귀 불가방침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대북사업을 정도경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비굴한 이익보다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며 여의치 않으면 대북사업을 포기하겠다는 초강수를 뒀다. 현 회장의 북측에 대한 공개적인 대응을 두고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북문제를 두고 북측에 공개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대북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에 ‘비공식적 성의’를 표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했다. 늘 북한을 달래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줘야만 사업이 가능했다.
현 회장의 대국민 발표를 두고 국민들은 이제 대북사업이 좀더 투명하게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됐다. 대북사업을 포함한 남북 경협은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국민들의 지지를 수반해야 하며 동시에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 회장의 입장 발표와 관련해 지난 1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6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북측 관계자는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면서 백두산 관광권은 “현 회장 개인이 아니라 현대에 준 것”이라고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강산 관광 중단 가능성도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의 배수진은 대북사업을 더이상 북한 측 뜻과 의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현 회장의 결단은 불투명한 ‘퍼주기식’ 대북사업이 지속될 수 없다는 국민적 이해를 확산시키는 계기도 되고 있다. 현 회장은 북측에 할 말을 했고 이젠 그들의 대답이 남았다. 북측은 개성관광을 현대가 아닌 롯데그룹에 준다며 우리 기업 간 과열 경쟁을 유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북측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현 회장의 승부수는 새로운 방식의 남북 경협모델을 심각하게 모색하고 고민하는 출발선이 돼야 한다. 대북사업은 국민의 지지와 이해가 바탕이 돼야 정통성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정 통일, “현정은 회장 중재 여지 좁혀” 정면 비판 “북-현대 갈등 적극 개입할 것”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4일 현대와 북한 간의 갈등으로 위기에 봉착한 금강산 관광사업과 관련, “현정은 회장이 정부의 조정·중재 여지를 줄였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평양에서 열린 16차 남북고위급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한 정 장관은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갈등에 대해) 정부도 걱정되는 바가 커서 오기 전에 현정은 회장을 만나 중재해볼까 타진했는데 그 다음날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입장을) 천명해 여지가 줄어들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도 어처구니 없고 안타깝다”
정 장관이 언급한 ‘인터넷 입장천명’은 현정은 회장 명의로 오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란 제목의 12일자 발표문이다. 현 회장은 이 글에서 “김윤규 부회장 퇴진은 대북사업 미래를 위한 읍참마속의 결단”이라며 “대북사업을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기로에 선 듯하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북한 당국도 현대아산 임직원의 열정을 믿어주기 바란다”라며 정면돌파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현 회장은 또 “지난 금강산 방문 때 핸드백까지 열어 보이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저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면서 “목숨과 맞바꾼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 모욕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며 북한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내비쳤다.
정동영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정 장관이 현정은 회장을 만난 것은 지난 11일. 현 회장은 이 만남 직후 이같은 입장을 표명했고, 발표 다음날(13일) 평양으로 향하는 정 장관을 난감하게 했다는 게 정 장관의 설명이다.
정 장관은 “7월 현 회장과 김윤규 부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난 지 두 달도 안돼 이런 상황에 처하게 돼 정부도 어처구니없고 안타깝게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이어 “8.15 때 북측 대표단이 서울에 왔을 때 이미 현대와 북측 간의 갈등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대화를 주선한 적도 있다”고 소개하고 “수습을 바랐는데 직접 대화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난감하기도 하고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DJ도 정부의 중재노력 부탁했다”
정 장관은 그러나 금강산 관광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금강산 관광은 정부의 희생과 지원이 있었고 국민들의 세금이 들어간 사업”이라며 “정부로서 해야 할 몫이 있다”고 말해 정부가 적극 개입할 뜻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언급은 금강산 관광이 현대와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간 민간 차원의 사업이라며 개입하지 않겠다고 해 온 정부가 기존 입장을 바꿔 장관급 회담 채널을 통해 북한과 이 문제를 적극 협의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 장관은 방북 전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대측의 사업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남북화해와 경제 협력의 상징이고 국제적으로 관심이 큰 사업인데 국민 걱정과 국제적인 시각이 우려스럽다. 장관이 적극 중재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중재 노력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현대와 북한 간의 갈등에 개입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방침이 이번 16차 장관급회담의 공식 의제로 아직 다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천식 장관급회담 남측 대변인은 14일 오전 열린 1차 전체회의에서 금강산 관광 얘기가 나왔냐는 질문에 “그 문제에 대해 협의된 바 없다. 상호 제기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北, “금강산 관광 중단되는 일 없을 것”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5일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막을 뜻도 없다는 입장을 알려왔다”며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16차 남북장관급 회담을 위해 평양에 체류하고 있던 정 장관은 고려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금강산 관광 등을 둘러싼 현대아산과 북한의 갈등을 풀기 위해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이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곧 만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 장관은 “금강산 관광과 관련한 우리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권호웅 내각책임참사를 비롯한 북측 관계자에게 전달하고 조기수습을 위해 남북 사업자가 직접 만나 입장을 교환할 것을 북측에 제안했다”며 “북측은 이에 대해 공감한다는 입장을 알려왔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앞으로 금강산 사업은 현대와 계속하겠다는 의미냐’는 질문에 “그것이 상식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 “고 정주영, 정몽헌 회장이 북한과 어렵게 개척한 사업이며 이 과정에서 김윤규 부회장의 공로가 컸다”며 “현대 내부의 문제로 실망했으며 금강산 관광 계속에 대한 현대측의 의지에도 회의를 느꼈다”는 입장을 설명했다고 정 장관은 말했다.
정 장관은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현대아산측으로부터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수석대표인 내가 전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따라 현대측에 직접 전달할 것을 권유했다”고 밝혔다.
정 장관은 또 일부언론 보도와 관련해 “내가 현정은 회장에게 김윤규 부회장의 복귀를 타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현대, 김윤규 유감 표명하되 원칙 강조하며 오해 풀기로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데 이어 북한 고위인사와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조만간 만날 예정이어서 대북관광 파행사태가 해결의 전기를 맞고 있다.
남북 장관급회담에 참석 중인 정 장관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거나 막을 뜻이 없다’는 북측의 입장을 전달받았다고 15일 밝혔다.
정 장관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인했다”며 “또 막을 생각이 없고 잘 되어 나갈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정 장관은 또 현대아산 김윤규 부회장의 사퇴파문을 계기로 불거진 현대와 북측의 갈등을 풀기 위해 현정은 회장과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곧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동영 장관의 중재를 계기로 이달 초부터 축소운영돼 온 금강산 관광은 정상화되는 전기를 맞게 됐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현 회장과 북측 관계자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 금강산 관광은 물론 개성관광도 원만히 진행되길 바란다”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현대측은 김윤규 부회장에 대한 징계조치와 관련해서는 북측에 일정한 수준에서 유감표명을 하되 원칙을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오해를 풀 계획이다.
양측 고위인사 차원의 대화가 복원되는 것을 계기로 600명 수준으로 축소된 금강산 관광은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관광 대가 문제가 걸린 개성관광과 백두산관광이 조기에 본궤도에 오를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박영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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