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는 오십에 바다와 그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기쁨을 발견했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기에 몰입돼 있었다. 천연덕스럽고 익살스런 말투로 관객을 웃기는가 하면 어느새 온몸으로 절절히 사무친 한(恨)을 끌어내 감정의 무방비 상태인 관객에게 전이시켰다.
“배우는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온몸이 에너지로 가득해야 비로소 혼이 실린 연기를 토해낼 수 있다.”는 박정자는 이화여대 재학시절 첫 무대를 밟았다. 동아 연극상 3회, 백상예술대상 4회, 서울신문 문화대상, 영희 연극상, 이해랑 연극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연극계의 대표적 여배우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나는 엄마가 처음으로 즐겼던 그 여름휴가와 엄마가 돌아오셨을 때의 환한 얼굴, 그리고 어린애같이 즐거워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와 그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기쁨을 발견했다.”는 딸의 독백.
엄마의 주검을 앞에 두고 엄마의 삶을 딸이 소설로 쓰는 형식을 취하는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늘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받는 엄마와 딸의 미묘한 감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현재 박정자가 열연하는 가정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주부인 엄마는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독립으로 깊은 외로움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나 딸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독립을 선언한다. 엄마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딸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려 해 모녀는 서로에게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남긴다. 딸의 독립 후 엄마는 나이 오십에 난생 처음 여름휴가를 떠나 바다에서 해수욕의 기쁨을 발견한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박정자는 “어머니는 불변, 불멸의 테마이다. 어머니도 한때는 딸이었고 그 딸이 다시 어머니가 되는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11년이 흘렀고 나는 그 동안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어머니는 나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셨다.”고 술회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배역에 푹 빠져버린 박정자가 그녀 자신에게 반해 버리는 그 순간, 그녀는 무대 위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생동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무대는 늘 엄격하다. 연습한 만큼, 몰입한 만큼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것이 무대다.”
무대 위에서 조용히 침대에 누워 죽어있는 연기를 하는 순간 그녀는 문득 ‘죽음도 이렇게 평온하고 편안하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 무대 위에서 온갖 삶과 감정을 다 겪어내는 그녀에게 무대는 늘 엄격하다. 연습한 만큼, 몰입한 만큼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것이 무대이기 때문이다.
박정자에게는 그녀의 열연을 거친 모든 작품들이 소중하지만 특히 인상 깊은 역할은 <19 그리고 80>의 80세의 노인역이다. 19세 청년과 사랑에 빠진 노인. 박정자는 이 작품을 앞으로 20년 후인 그녀 나이 80세까지 연기할 작정이라며 당찬 자신감을 보였다.
흔히 말하듯 연극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인간의 첨예한 갈등과 바닥 깊은 모순까지 끌어내 표현하는 것이 연극이다. 연극을 통해 관객들은 자신의 갈등과 모순을 자각하고 공감하며 서로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배우의 숙명을 타고난 그녀는 “오랫동안 연기를 하다보니 스스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때가 있다. 연기를 통해 새로 깨달음을 얻고 또 배운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므로 기계적 매카니즘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삶은 늘 예측불허의 상황이 반복된다. 이런 예측불허를 무대 위에 담아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 그들과 일치되는 순간 난 행복을 느낀다. 성숙한 관객은 한 편의 연극을 통해 흥미를 얻어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간다. 우리 모두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연극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원히 ‘연극배우 박정자’로 남고 싶다는 그녀는 어느새 ‘연극배우 박정자’의 삶 속에 완전히 몰입돼 있었다.
김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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