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투데이 장수진기자]지난 10여 년간 한국 뮤지컬계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 해왔다. 몰래 도둑질하듯 해외 유명 작품을 copy해서 공연을 하던 시대에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는 1998년 <더 라이프>라는 작품을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들여와 제대로 된 공연을 선보이면서 뮤지컬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 후 수많은 작품이 수입 되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확보한 작품이 공연되면서 tv 앞에 앉아 드라마에 빠져있던 중장년층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성과를 거두며 뮤지컬계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 해왔다.
그러나 5,6년 전에 그 성장은 멈춰 버렸고 뮤지컬계에도 거품 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경기가 침체되면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문화생활에 드는 비용을 줄였고 그 결과 공연장을 찾는 관객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유의 도전 정신으로 현실과 대면해 위기를 호기로 여기고 더 이상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은 들여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국내 순수창작품 발굴에 힘쓰겠다고 선언한 박명성 대표의 행보가 눈에 띈다.
1막, 연극인의 꿈을 품다.
전남 해남 출신인 그는 단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자기 안에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오로지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는 군대 3년을 제외하고 이십대를 몽땅 연극판에 바쳤다. 그럼에도 그에게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모두 작은 역할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함께 연극을 했던 김갑수와의 인연으로 잡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당시 실력파 연극인들이 모여 있는 극단 마당 세실의 대표 김상열 선생 밑에 있었는데 배역을 맡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연극판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고민 끝에 김상열 선생께 스태프를 하겠다고 자청해 조연출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그렇게 허드렛일을 도맡아 훌륭한 연출가가 되겠다는 포부도 품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다른 곳에서 빛을 발했다. 첫 연출작으로 자신의 연출 능력을 스스로 점검하게 되면서 연출가로써도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을 하던 연극판에서 떠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시 기획자라는 말조차 어색했던 시대에 김상열 선생이 새롭게 창단한 신시에서 기획과 행정적인 모든 부분을 총괄하는 기획자가 되면서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2막, <더 라이프> 프로듀서의 길을 걷다.
자신이 꿈꾸었던 것을 포기하는 것에도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연극배우로써 연출가로써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줄 알았다. 조연출을 하면서 극단의 살림과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극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노하우도 생겼고 어느새 기획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연출 경험은 현장에서 몸뚱이 하나로 직접 체험하면서 체득한 산교육이 되어 그에게 뮤지컬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지금은 연극이나 뮤지컬 작품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공연화 되고 있지만 90년대만 해도 해외 유명 뮤지컬을 정식으로 수입해 공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때 그는 우리 관객들이 보는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의 3,40년 전 레퍼토리만 봐야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브로드웨이로 직접 달려가 ‘더 라이프’라는 뮤지컬의 라이선스 계약을 어렵게 체결했다. 한국의 뮤지컬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브로드웨이 측 관계자에게 한국이 기회에 땅임을 설득 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막, 공연계의 ‘미다스 손’으로 통하다.
그가 뉴욕에서 힘든 시간을 견디는 동안 신시특공대는 새로운 공연을 올리면서 그와 계속 소통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묻고 결정했다. 다행이 ‘사운드 오브 뮤직’이 성공하면서 그는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도 뮤지컬 제작과 관련한 실패와 성공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 됐다.
그는 뮤지컬 ‘갬블러’, ‘맘마미아’, ‘렌트’, ‘시카고’, ‘아이다’ 등 메이드 인 박명성표 초대형 뮤지컬을 제작했다. 특히 ‘맘마미아’는 TV 드라마에 빠진 중·장년층 관객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면 뮤지컬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그는 스스로도 한국 뮤지컬의 대중화와 활성화에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여러 뮤지컬이 그의 손에서 제작되고 국내 뮤지컬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이유다.
4막, 뮤지컬. 돈벌이 수단으로 보지 마라.
국내 뮤지컬 시장이 10년 전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 뮤지컬계가 팽창하고 급성장하다보니 거품이 생기고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5, 6년 전부터 제작되는 작품의 수는 많아졌지만 완성도 높은 수준 있는 작품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몇몇 뮤지컬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일부 제작 경험도 없고 연극에 대한 뿌리도 없는 사람들이 공연계에 뛰어들면서 거품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제작 노하우가 없다 보니 인건비에 배팅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또한 서로 해외 뮤지컬을 경쟁적으로 수입하려다 보니 로얄티를 우리 스스로 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도한 경쟁이 스스로를 침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돈벌이 수단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작품을 질을 떨어뜨린다. 그는 연극정신에 뿌리를 두고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제작자로써 프로듀서로써 자존심, 사명감, 책임감을 놔 본적이 없다. 현재 국내 뮤지컬 시장이 위태로운 상황임을 깊이 인식한 그는 위기가 호기라고 판단한다. 이럴 때 수준 있는 웰 메이드 뮤지컬을 내놓는다면 분명 관객들을 다시 공연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5년 만에 다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공을 들여 ‘아이다’를 다시 무대 위에 올렸다.
5막, 엔딩은 없다.
그의 뮤지컬 인생에 막이란 없다. ‘연극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이든 세상이든 뭔가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게 내 안에 연극’이라고 말하는 프로듀서 박명성. 그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이 있는데 그 선을 지키면서 격조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대학로의 연극이 오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도 안타까움을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선언한다. 더 이상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은 들여오지 않겠다고. 초심으로 돌아가 순수기초예술에 투자 하겠다고. 대형 뮤지컬을 해온 신시의 조직력, 노하우, 자본을 연극과 순수 창작뮤지컬에 투자해 이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을 올리겠다고. 그래서 그의 뮤지컬 인생에 5막은 없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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