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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대한국 국새(國璽)는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2015-03-16 08:54:20]
 
대한국 국새(國璽)는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대한국 국새(國璽)는 금새(金璽), 조선국 보(寶)는 금보(金寶), 옥보 아니다 보뉴,보신의 재질,형태와 보면의 전자획(篆字畵) 보고 진위(眞僞) 판정 http://blog.naver.com/msk7613 1403년 4월 8일 명국(明國) 3대 황제(재위 1402∼1424)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칙유(勅諭)에 “짐은 정적(政敵)들을 제거하여 1393년 2월 15일 조선국을 건국하고 태조 이단, 정종 이경(李曔)인 부형(父兄)을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왕권을 강화해 자부심이 강하여 국왕으로 즉위하고 외자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국(1393-1897) 3대 국왕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휘(諱) 이방원(李芳遠)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조선국(1393-1897) 3대 국왕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휘(諱) 이방원(李芳遠)이 과연 천도(天道)를 공순(恭順)히 하고 우리 황고의 깊은 은혜를 생각하여 곧 배신(陪臣)을 보내서 표문(表文)을 받들어 조공(朝貢)하였으니, 예의(禮意)의 부지런함이 족히 가상할 만하다.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조선 국왕의 금보(金寶), 고명(誥命)을 주어 그대로 하여금 은총과 영광을 빛내게 한다. 대대로 제후의 나라인 번방(藩邦)을 지켜서 그대 땅 이토(爾土)를 다스려 편안케 하여 동방(東方)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모두 복택(福澤)에 젖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하였다. 1406년 8월 21일 성석인(成石璘)이 태종에게 아뢰기를 “어제 명(命)이 계시기를 ‘전위(傳位)하기가 어려운 것을 나도 또한 요량하였다.’ 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동궁(東宮)에게 금제(金製)인 대보(大寶)를 전하게 하였다고 하니 신 등은 모두 실망하였습니다. 자손(子孫)에게 전하는 법을 이와 같이 은밀(隱密)하게 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대보(大寶)를 도로 거두시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성석린(成石璘)·조영무(趙英茂) 등이 말하기를 “금제(金製)인 대보(大寶)는 천자(天子)가 하사하신 것이므로 상서사(尙瑞司)의 관원에게 명하여 받들어 들이심이 옳겠습니다.”하였다. 하윤도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에 꼭 전위(傳位)하고자 하신다면 위로는 마땅히 명국(明國) 조정에 계품(啓稟)하시고, 아래로는 마땅히 신민(臣民)에게 포고하셔야 하며 명국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신민에게 내리는 교서(敎書)에는 반드시 대보(大寶)를 찍어서 신표(信標)를 삼아야 합니다.”하였다. 1432년 10월 12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명국 황제가 보내 준 금제(金製)인 대보(大寶)의 글에 조선 국왕(朝鮮 國王)이라고 하였사오니 이는 국내의 보통 일에 쓰기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국왕의 신보(信寶)를 부어 만들어서 사신(事神)·교유(敎宥)·공거(貢擧) 등의 일에 쓰게 하옵시고, 국왕의 행보(行寶)도 만들어 책봉(冊封)·제수(除授) 등의 일에 쓰게 하옵시며, 그 황제가 보내 준 대보(大寶)는 사대 문서(事大文書)에만 쓰시고 그 밖에는 쓰지 마옵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33년 3월 2일 세종이 행보(行寶)와 신보(信寶)가 제작하였다. 집현전에 명하여 옛 제도를 상고하여 이 두 보(寶)를 고쳐 만들게 하였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이 황제가 보내준 흠사(欽賜) 대보(大寶)에 의하여 모두 금으로 제작하고 신보의 무게는 1백 64냥이고 행보의 무게는 1백 76냥이었다. 신보의 글은 ‘국왕 신보(國王信寶)’이고 행보의 글은 ‘국왕 행보(國王行寶)’인데 신보는 사신(事神)·교유(敎宥) 등의 일에 쓰고 행보는 책명(冊命)·제수(除授) 등의 일에 쓰며 흠사(欽賜) 대보(大寶)는 사대 문서(事大 文書)에만 썼다. 1451년 3월 16일 문종이 상서사(尙瑞司)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제부터 사대 문서(事大文書)와 야인 관교(野人官敎)에는 금제(金製)인 대보(大寶)를 쓰고, 모든 제수(除授)에 관계되는 것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쓰라.”하였다.1470년 11월 29일 성종이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조하(朝賀)할 때에 대보(大寶)를 올리지 말게 하라.”하였다.1493년 7월 6일 이극균(李克均)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금제(金製)인 대보(大寶)의 전문(篆文)에 쓰기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 관교와 비초(批草)에 쓰면 ‘조선’ 두 글자가 있어서 뜻에 맞지 아니합니다. 또 작상(爵賞)은 모두 시명(施命)의 뜻인데, 조종조에 의하여 시명지보를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야인의 관교에는 대보를 쓰는 것이 이치에 마땅합니다.”하였다. 1786년 4월 11일 정조가 말하기를 “명국(明國) 헌종 성화제(憲宗 成化帝)가 금제(金製)인 대보(大寶)를 내려 주었는데 사대 문자(事大文字)에는 모두 이 보를 써오다가 중간에 유실되었다. 숙종조에 승정원의 고지(古紙) 가운데 인적(印跡)을 얻었는데 숙종이 하교하기를 ‘명국에서 내린 본전문(本篆文)이 어제 일과 같다. 이를 본떠 전각하여 금보로 만들어 두고 쓰게 하여 후세의 자손들이 이 금제(金製)인 대보(大寶)를 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명국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고 싶다.’고 하셨다. 왕위를 계승할 때에 이 보를 대보(大寶)로 삼으라고 명하셨다.”하였다. 대교 이곤수(李崑秀)가 말하기를 “성고(聖考)의 보전(寶篆)은 승정원에서 받들고 있는 보인데 청국 전자로 조선국왕비지인(朝鮮國王妃之印)이라고 썼으며 명국에서 내린 보는 전자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썼는데 두 보의 전문도 보록 가운데 자세히 기록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정조가 옳게 여겼다. 문화재청은 문화기관 소장 어보는 이관하고 미국에서 압수한 제정 대한국 어보는 고궁박물관에 국가귀속하여 대례의궤(大禮儀軌),실록(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편수,감수), 전적(전체 또는 부분 위조,묵서(墨書)는 깨끗이 지우고 변조 가능),신문 등을 깊이 조사(調査)하고 생각하여 따져 보는 연구(硏究)한 후 전시, 교육홍보하여야 한다. 대한국새,황제지새의 용을 조각한 새뉴는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제후,번왕)를 굽어살핀다. 새면(璽面)에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하였다.어보(御寶)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금제(金製)인 대보(大寶), 태묘 신실에 봉안하는 의례용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 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고 의례용 어보는 태묘의 신실 보장에 봉안하였다. 진 시황(秦 始皇)이 화씨지벽(和氏之璧)으로 제작한 전국새(傳國璽)를 만든 후부터 국새(國璽)를 전국(傳國)과 국권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명국 태조 홍무제가 공민왕에게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보냈고 1393년 조선국(朝鮮國:1393-1897) 건국 이후에도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칭호,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사용하고 고려시대 후기 고려국 국왕의 용포인 청룡포(靑龍袍)를 착용하였으며 명국 성조(成祖)가 조선국(朝鮮國) 국왕의 즉위나 왕비, 왕세자, 왕세제 책봉 시 승인하는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조선국(朝鮮國) 3대 국왕 태종에게 보내고 조선국(朝鮮國)은 이 조선국왕지인을 국가와 국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로 사용하였다. 1444(세종 26)년 3월 26일 사은사(謝恩使) 류수강(柳守剛)이 중국 황제에게 받아온 홍룡포(紅龍袍)는 조선국 국왕의 시무복으로 1444(세종 26)년 착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국(1897- ) 건국 후 1대 황제 고조 광무제가 황룡포(黃龍袍)를 입었다. 조선국(朝鮮國:1393-1897)은 세종조부터 조선국 초기 책봉(冊封),제수(除授)에 사용한 국왕행보(國王行寶), 사신(事神),사유(赦宥),공거(貢擧)에 사용한 국왕신보(國王信寶), 국왕행보를 대체한 시명지보(施命之寶), 국왕신보를 대체한 소신지보(昭信之寶),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試券),대과(大科) 급제 증서 홍패(紅牌), 소과(小科) 입격 증서 백패(白牌)에 사용한 과거지인(科擧之印), 유서(諭書)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서적을 하사할 때 쓰는 선사지기(宣賜之記)의 7가지 어보(御寶)를 자체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영조조부터 고조(高祖:1863- )조까지 중국 황제와의 외교문서에 사용한 금제(金製)인 대보(大寶), 교명(敎命)·교서(敎書)·교지(敎旨),임금이 문무관 1품에서 4품까지의 관리에게 내리는 사령(辭令) 교지(敎旨)인 관교(官敎)에 사용한 시명지보(施命之寶), 관찰사, 절도사 임명 시 명령서인 유서(諭書)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試券) 및 대과(大科) 급제 증서 홍패(紅牌)· 소과(小科) 입격 증서 백패(白牌)에 사용한 과거지보(科擧之寶),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한 책을 하사할 때의 내사인(內賜印),어제(御製)에 사용한 규장지보(奎章之寶),1889년 고조(高祖)가 춘방(春坊) 교서(敎書)에 안보(安寶)하게 명한 준명지보(濬明之寶) 등 10과의 어보(御寶)가 있었다. 임금의 이름은 휘(諱)라 하고 임금이 관례를 행하면서 받는 호칭은 자(字), 대한국 황실 사당인 태묘(太廟)의 신실에 3년상(三年喪:27개월)을 끝낸 뒤에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부묘(祔廟)할 때 붙이는 조(祖)와 종(宗)의 호(號)인 묘호(廟號),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가 있다. 왕권을 상징하고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어보(御寶)는 상묘호(上廟號),조선국 국왕과 왕후의 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와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 등을 새기는 상존호(上尊號),추상존호(追上尊號),상시호(上諡號)를 하였으며 추가로 존호에 다시 더 존호를 붙이는 가상존호(加上尊號)를 할 때마다 어보를 새로 제작하여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에 사용하고 대한국(大韓國) 황제와 황후의 신위를 봉안한 황실 묘궁(廟宮)인 태묘(太廟)의 신실(神室) 보장에 봉안했으며 신주장(神主欌) 서쪽 우백호(右白虎)의 선왕의 신주는 백색 올이 가늘고 고운 모시인 세저포(細苧布) 건(巾)으로 덮고 신주장 동쪽 좌청룡(左靑龍)의 선후의 신주는 청색 올이 가늘고 고운 모시인 세저포(細苧布) 건(巾)으로 덮었고 어보는 책보봉안도(冊寶奉安圖)에 보면 국조보감(國朝寶鑑)과 함께 보장(寶欌:동장)에 국왕, 왕후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책장(冊欌:서장)에 봉안하였다. ​ 어책(御冊)은 국왕·왕후·왕대비·대왕대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존호(尊號)를 올리는 문서로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옥책(玉冊)과 존호를 새긴 금보(金寶)를 정해진 의식과 함께 올리며 이를 책보(冊寶)라고 하며 국왕이 직접 어책과 어보를 올리는 의식은 친상책보의(親上冊寶儀)라고 한다. 조선국 세자,세자빈에게는 옥인,죽책을 국왕,왕후에게는 금보,옥책을 올리고 대한국 황제,황후,황태자,황태자비,친왕,친왕비에게 금보(金寶),금책(金冊)을 올린다. 어책문(御冊文)은 올리는 사람, 일시, 존호(尊號), 그리고 존호를 받는 사람을 칭송하는 송덕문(頌德文)을 간략하게 쓴다. 어보(御寶), 어책(御冊)의 제작에 문장을 저술한 제술관(製述官)과 보전문(寶篆文)을 쓰는 서사관(書寫官), 보전문(寶篆文)을 정사(精寫)하는 사자관(寫字官),금(金), 은(銀), 옥(玉)에 글자를 새길 때 글씨를 쓴 얇은 종이의 거죽에 밀을 칠하여 그 뒤쪽에서 비치는 글자 테두리를 그려서 금(金), 은(銀), 옥(玉)에 붙이고 자꾸 문질러서 글씨 자국이 나도록 내려 앉히는 북칠(北漆) 화원, 금(金), 은(銀), 옥(玉)에글자나 그림 등을 새기는 일을 하는 조각공인 각수(刻手)가 참여하였다. 어보(御寶)는 임금의 호(號)가 새겨져 있는 방형(方形)의 보신(寶身)과 제후를 상징하는 거북이·황제를 상징하는 용 등이 조각된 어보 손잡이인 보뉴(寶鈕)로 구성되어 있는 전각(篆刻)이다. 제정 대한국(1897-1919) 국새 새뉴(璽鈕)의 용(황제)은 타원형이 아닌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제후,번왕)를 굽어살핀다. 황제가 하사하는 보뉴의 거북(제후,번왕)은 위(황제)를 우러러보며 보수가 통과하는 구멍이 작은 원형이다.1897년 10월 12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국(1897-1919)을 건국하면서 보뉴의 거북이가 황제의 상징인 용으로 바뀌게 된다. 보신(寶身)의 바닥면에는 9첩전(九疊篆)으로 묘호(廟號),덕을 기리며 올리는 존호(尊號), 승하하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보면(寶面)이라고 하며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하였다. 새면(璽面),보면(寶面)의 전자획(篆字畵)을 비교해보고 국새,어보의 진위를 판정할 수 있다.보뉴에는 어보를 잡기 편하게 하면서도 장식성을 더한 보수(寶綬)가 있으며 영자(纓子), 방울, 술로 구성되어 있다. 어보의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하였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하고 금으로 도금하였다. 국새보다 큰 어보(御寶)는 어보를 넣는 내함인 보통(寶筒), 보통(寶筒)을 넣는 외함(한약재로 된 방충제 의향(衣香)을 넣어 자물쇠로 잠금)인 보록(寶蘊),검은색 곰가죽 흑웅피(黑熊皮)에 비단실을 넣어 장식한 보록(寶蘊)을 담는 겉상자인 호갑(護匣)으로 이루어진다. 보통(寶筒),보록(寶蘊)을 보갑(寶匣)이라고 하며 인주를 담는 주통(朱筒), 주록(朱蘊)도 있다. 대례의궤(大禮儀軌)는 1897년 9월 칭제(稱帝)운동이 시작되어 10월 11일 대한국(大韓國) 제천단(祭天壇)인 황단(皇壇)에서 천제(天帝)에 고유(告由)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10월 12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가 대한국 1대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하고 왕후와 왕태자가 황후(皇后)와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되고 10월 12일 대한국이 건국(建國)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일(日),월(月), 성신(星辰), 산(山), 용(龍), 화충(華蟲), 화(火), 보(摠), 종이(宗彛), 조(藻), 불(黻), 분미(粉米)의 12장문(十二章紋)을 수놓은 12장복(十二章服)을 입고 금칠(金漆) 용교의(龍交椅)에 올라앉는 상좌하여 금제(金製) 용새뉴가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제후,번왕)를 굽어살피는 대한국새, 황제지새인 국새(國璽)를 받았다. 대한국 1대 황제 등극식을 마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와 태극전(太極殿)에서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축하를 받았다. 12시에 왕비를 황후(皇后)로 책봉(冊封)하였고, 2시에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대신(大臣)들은 만세(萬歲)를 세 번 불렀다. 10월 12일 밤 한성(漢城)은 집집마다 태극기(太極旗)를 걸고 황제(皇帝)의 등극(登極)을 경축하였다. 대한국 건국 과정은 대한국 고조 광무제 실록(實錄)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실록이 사건 위주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 대례의궤(大禮儀軌)는 용새뉴가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를 굽어살피며 새면에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한 대한국새, 황제지새인 국새(國璽),보(寶),금책(金冊)을 바치는 의식(儀式)의 절차와 의식에 쓰인 의장물(儀仗物)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도설(圖說),반차도(班次圖)가 수록되어 있다. 대례의궤는 9권을 만들어 황색 비단으로 장정(裝幀)한 황제(皇帝) 어람용(御覽用)은 규장각(奎章閣)에, 황태자(皇太子) 예람용(睿覽用)은 시강원(侍講院)에, 홍포로 장정한 분상용(分上用)은 황단(皇壇),비서원(秘書院),장례원(掌禮院),정족산(鼎足山),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에 나누어 봉안하였고 어람용(御覽用)과 예람용(睿覽用)은 초주지(草注紙)로 만들고 분상용은 저주지(楮注紙)로 만들었다. 대례의궤(大禮儀軌) 제작은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도제조(都提調)를 맡고 궁내부 대신(宮內府 大臣) 민영규, 장례원 경(掌禮院 卿) 김영수,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 大臣) 정낙용이 제조(提調)를 맡았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高祖)가 대한국(1897- )을 건국하고 1대 광무제로 등극하여 금제(金製)의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칙명지보(勅命之寶),제고지보(制誥之寶),칙령지보(勅令之寶),고조 광무제의 대원수보(大元帥寶),황태자 이척의 원수지보(元帥之寶)를 새로 제작하였다. 금제(金製)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는 황제를 상징하는 새뉴(璽鈕)의 용(황제)은 타원형이 아닌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를 굽어살핀다. 황제가 고명과 함께 하사하는 보뉴의 거북(제후,번왕)은 위를 우러러보며 보수가 통과하는 구멍이 작은 원형이며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하였다.1900년 8월 17일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皇子)들을 친왕(親王) 책봉(冊封)하였다. 이강(李堈)은 의친왕(義親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친왕(英親王)으로 삼았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반칙문(頒勅文)에 “황제들이 천명(天命)을 받아 여러 아들을 책봉하는 것은 자손을 융성하게 하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이다. 짐(朕)은 둘째 황자(皇子) 이강과 셋째 황자 이은은 모두 황제 가문의 귀중한 사람들로서 마땅히 높은 칭호를 주어야 하니 태묘(太廟)에 미리 고하고 좋은 날을 받아 이강은 의친왕(義親王)으로 봉하고 이은은 영친왕(英親王)으로 봉하였으며 금책(金冊)과 금인(金印), 7장복(七章服)을 하사한다."하였다. ​러일전쟁을 예견한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독일,이탈리아,러시아 황제,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일본군국주의가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늑결하였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프랑스 대통령,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황제어새는 2 종류인데 한 종류는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다른 한 종류는 1906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유리원판 사진만 남아 있다. 1907년 7월 황태자 이척이 금보(金寶),금책(金冊)을 제작하였다. 대한국(Daehan Empire:1897-1919) 고조 광무제가 비공식 제작(특정 어보의 보면에 다시 조각)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이며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는 내대신(內大臣)이 관리하였다. 대한국 영토 안에서의 러일전쟁 발발 등 비상 상황때문에 대한국 1대 황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가 비공식 제작한 황제어새(皇帝御璽)를 비장(秘藏)하였다. 1907년 7월 이토 히로부미 일본군국주의 통감의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는 황태자 이척이 금보(金寶),금책(金冊)을 제작하였다.1907년 9월 6일 대리청정하는 황태자 이척은 금보(金寶)를 만들었을 때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 부사(副使) 정한조(鄭漢朝)·김학진(金鶴鎭), 독금책관(讀金冊官) 민찬호(閔贊鎬), 독금보관(讀金寶官) 김갑규(金甲圭)에게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1907년 7월 일본군국주의 통감은 정미늑약을 불법 늑결하여 황태자 이척(1919년 1월 2대 황제 등극)에게 대리청정(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Gojo Gwangmooje:1897-1919)의 치세)을 명령하였다.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1911-35년 일본군국주의이왕가실록 편찬 시 고조 광무제의 전위(傳位),태황제 존봉(尊奉)을 삽입하였으나 일본군국주의가 잘못 제작한 옥책문(정미년 8월 2일 황태자 신(臣) 척(坧) ......)에도 1907년 8월 2일 대한국(Daehan Empire:1897-1919) 황족 책봉, 황제 추존권자가 아닌 대리청정하는 황태자 이척이 제정 대한국 1대 황제인 고조 광무제를 황제 추존하였다고 하여 일본군국주의가 날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국주의 통감이 고조 광무제(대한국 1대 황제, 추존 황제가 아니다)의 태황제보(황제는 옥보가 아닌 금새(金璽)이며 육안으로 새면의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제작을 명령하였으나 태황제는 일본군국주의가 대한국 황제 추존례로 악의적으로 잘못 올린 제호이므로 일본군국주의가 불법적으로 만든 태황제보는 잘못 제작한 후궁 엄씨의 인(융희제와 후궁 엄씨의 한자가 같을 수 없다)과 함께 대한국 어보가 아니다. 1911년 3월 3일 일본군국주의 총독부(總督府)는 차관(次官) 고미야 미호마쓰가 가지고 있는 고조 광무제가 외교 문서에 사용한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顆),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고급 관리의 임명장에 사용한 제고지보(制誥之寶) 1과, 칙명지보(勅命之寶)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 등 금제(金製), 은제(銀製)의 대한국 국새(國璽)와 보(寶)를 인수하였고 일본군국주의이왕가실록은 대한국 황제실록이 아닌 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1911-35년 편찬한 일본군국주의 통감부, 총독부일지이며 용새뉴가 타원이 아닌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를 굽어살피는 대한국의 새(璽)와 보신(寶身)의 형태가 방형(方形)의 보신(寶身) 아닌 태황제보와 후궁 엄씨의 인(황태자 이척(융희제)와 한자가 같을 수 없다)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한 대한국 새보의 양식과 전혀 달라 제작 시기를 확인하여야 한다. 보뉴,보신의 재질,형태,전자획(篆字畵)을 보고 국새,어보의 진위를 판정할 수 있다. 금제(金製)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는 1936년 5월 31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1907년 9월 23일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가 고미야 미호마쓰를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다. 11월 8일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 고미야 미호마쓰, 내부 차관(內部 次官) 기노우치 주시로와 탁지부 차관(度支部 次官) 아라이 겐타로를 임시로 제실 소유 및 국유 재산 조사국 임시 위원(國有財産調査局 臨時 委員)에 임명하였다. 11월 30일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 고미야 미호마쓰에게 제실 재산 정리국 장관을 겸임시켰다. 1909년 2월 15일 궁내부 차관(宮內府 次官) 고미야 미호마쓰에게 궁내부 대신(宮內府 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1911년 2월 1일 총독(總督)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민병석(閔丙奭)을 이왕직 장관(李王職 長官)에 임용하고 고미야 미호마쓰를 이왕직 차관(李王職 次官)에 임용하였다. 1911년 3월 3일 일본군국주의 총독부(總督府)는 이왕직 차관(次官) 고미야 미호마쓰가 가지고 있는 고조 광무제가 외교 문서에 사용한 금제(金製)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顆),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고급 관리의 임명장에 사용한 제고지보(制誥之寶) 1과, 칙명지보(勅命之寶)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 등 금제(金製), 은제(銀製)의 대한국 국새(國璽)와 보(寶)를 모두 인수하였다. 황제지새는 옥보가 아닌 금새(金璽)이며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하여 새면의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새뉴,새신,보뉴,보신의 형태와 재질 및 새면,보면의 전자획(篆字畵)을 보고 국새,어보의 진위를 판정할 수 있다. 1911년 7월 고조 광무제의 후궁(後宮) 엄씨(嚴氏)가 경운궁 태극전인 즉조당(卽祚堂)에서 졸(卒)하였고 일본군국주의 총독이 으뜸 후궁(後宮) 귀비(친왕의 어머니는 귀비 진봉 가능,나 홀로 귀비 진봉 기록)로 임명하였다는 1935년 완료한 일본군국주의 이왕가실록 기사는 날조되었다.(융희제(황태자 이척)와 한자가 같을 수 없다) ​ 금제(金製) 대한국새(大韓國璽),황제지새(皇帝之璽)는 새뉴(璽鈕)의 용(황제)은 타원형이 아닌 원형의 여의주를 물고 머리가 몸보다 낮고 아래를 굽어살핀다. 황제가 제후 임명장인 고명과 함께 하사하는 보뉴의 거북(제후)은 위를 우러러보며 보수가 통과하는 구멍이 작은 원형이고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게 전자획(篆字畵)을 조각하였다.1911년 3월 3일 일본군국주의 총독부(總督府)는 이왕직 차관(次官) 고미야 미호마쓰가 가지고 있는 고조 광무제가 외교 문서에 사용한 대한국새(大韓國璽) 1과(顆), 황제지새(皇帝之璽) 1과,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고급 관리의 임명장에 사용한 제고지보(制誥之寶) 1과, 칙명지보(勅命之寶)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 등 금제(金製), 은제(銀製)의 대한국 국새(國璽)와 보(寶)를 인수하였고 1945년 광복 직후 민주공화정 대한국 정부가 맥아더사령부와 교섭하여 8과를 되찾아 1949년 1월 제정 대한국 황궁 경운궁 안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였고 5과가 사라졌다. 1950년 6.25경인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6.25경인전쟁 정전 후 대원수보, 제고지보, 칙명지보는 1954년 6월 부산의 경남도청 금고에서 찾았으나 사라진 5과는 행방을 모를 수 없는 국립박물관, 총무처 양 측이 행방을 모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화재청은 미국으로 불법반출이 확인되었으므로 국가귀속, 대례의궤(大禮儀軌:종이의 색,촉감이 다른 경우 냄새를 맡아보면 시대 구분 가능), 1935년 일왕,일본군,총독부 일지 성격의 실록(일본군국주의 총독부가 편수,감수), 전적(종이의 색,촉감이 다르면 후에 끼워넣은 것,전체 또는 부분 위조,묵서 변조 가능), 동아일보 기사(대한국새,황제지새)를 깊이 조사(調査)하고 생각하여 따져 보는 연구(硏究)한 후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2015-03-16 08: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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